공주와 기사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꽤 잘 팔리는 클리셰다. 공주는 꼭 왕자와 결혼해야 하는 줄만 알았던 아이들이 자라 새로운 로맨스에 눈을 뜬 모양이다. 실은 얼굴도 모르는 왕자를 기다릴 바에야 늘 공주 옆에서 든든하게 지켜주는 기사를 이미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굳게 다물린 그 입술을 보며 행복한 결말을 상상하고 있었을 거다. 저와 함께 떠나요, 공주님. …

 

 

한경은 어릴 때부터 성격만 살가웠지 좋아하는 건 몇 개 없었다. 인간에 국한한 애정은 주변에 제일 많은 게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불만 많은 소년을 행복해 보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좋아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곧장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불편한 일이었다. 생일에는 갖고 싶은 선물 대신 좋아하는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좋다고 말한 피자를 먹는 게 고작이었다. 싫어하는 게 많은 것도 그랬다. 그렇게 좋아한다고 말한 것들과 온종일 지내고 나서도 비가 온다면 그날 기분은 말짱 꽝이다. 지루하게 흘러가는 생활에 기분을 망치는 것 정도야 아주 쉬웠다. 

 

뭐든 시작은 단순하다. 우연히 TV에 나온 사격 경기가 멋있어 보였고 그걸 흉내 낸다며 몇 번 장난감 총을 사 모으기 시작하더니 끝내 사격장에 가고 싶다고 졸랐다. 남부럽지 않게 부유한 집안 맏이라는 지위는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기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드물게 흥미를 보였다는 이유로 본격적인 장비가 생기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멋진 미래를 상상했다. 좋아하는 일이 생겼으니 나도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줄 존재가 될 수 있겠지. 자신의 총을 잡으며 부푼 마음으로 꾸는 꿈은 크다.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뭐든지 뜻대로 되는 게 인생이라면 세상 살이 참 편했을 거다.

 

10초가 어느 정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는 건 그냥 하는 말이다. 제한 시간이 걸린 스포츠에 몇 초 단위 의식하는 것 정도는 나름대로 연습되어 있었다. 처음엔 절반, 그다음엔 온전히 채워서. 한경은 눈을 보고 하는 대화를 좋아한다. 자신을 향한 눈빛이 진심을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득 누군가의 눈을 관찰하듯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는 걸 느꼈다. 처음은 그저 장난이었고 진짜가 되어버린 일에 어느 순간 초를 세고 있었다. 무엇 하나에 집중하는 시간은 조금 더 길게 느껴졌다. 곧장 앞에 있는 율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스쳐 지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말을 사소한 기억으로나마 남겨줬다는 사실에 조금 들뜬 것도 같았다. 그 밤은 기분 좋은 날이었다.

 

 

… 식사 예절, 사교 대화, 역사적 상식, 심지어는 걷는 방법까지. 어디에서나 그렇듯 공주는 그 어떤 곳에서든 완벽해야만 했다. 아직도 서툰 부분이 있다며 매번 꾸지람을 듣지 않았을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정해진 삶을 살아가는 공주에게 사랑하는 기사는 도피처로 삼기 좋아 보인다. 위험에 대비해 주위를 맴도는 기사를 어떻게든 찾아내어 새로운 시도를 했겠지. 허락되지 않은 시간 성 밖으로 나가고 싶다며 조르거나 아직 걷는 연습이 필요하다며 손잡아 주기를 요구하며 눈을 맞출 때 공주의 가장 행복한 미소를 기사도 알게 된다면 …

 

 

고등학생 정도면 몇 년을 같이 지낸 가족보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함께 하는 학교 친구들이 더 좋을 수도 있는 나이다. 지금 한경이 딱 그랬다. 끝나지 않은 사춘기 같은 것도 아니었고 뒤늦게 찾아온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주말이면 기숙사에 콕 박혀있었다. 아직도 기숙사에 머물고 있는 친구들을 하나 둘 끄집어내 소소하게 수다 떨며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는 일이 일종의 취미였다. 조용한 기숙사에서 그날 하루 함께 지낼 사람을 찾아내면 기분 좋게 웃곤 했다. 얼마 전 여동생이 전국체전 고등부에서 메달을 땄다며 입이 닳도록 자랑하는 걸 보면 그 질리지 않는 박애주의는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말임이 분명했다. 친구들이 잔뜩 있는 학교생활에 아주 만족한 거라고 해두자. 이곳저곳 관심 가지며 치대는 성정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집에 가는 게 싫다. 가족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으나 한경 일방적으로 어색하게 느끼는 것뿐이다. 집에 비교 대상이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우울감이 잦다. 해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권태감과 바뀌는 게 없다는 점에서의 무기력함은 사람을 쉽게 망가뜨렸다. 오래도 버텼다. 심해진 감정 기복에서 오는 짜증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을 좋아하는 한경은 또다시 좋아하는 친구를 택했다. 율은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묵묵히 받아줬다. 공주님, 하는 호칭과 함께 들어올려질 때에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잡념 대신에 지금 이 순간 즐겁다는 생각만이 남았다. 꼭 거짓말 같았다. 매 순간 함께 지내는 사람들을 놓을 수 없겠다고. 싫은 감정 가득한 투정을 그저 들어주는 게, 그게 그냥 그렇게도 좋았다.

 

조급함이 문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총을 억지로 쥐고 체육관에 박혀있는 것도 더 이상은 못 할 일이다. 문득 욕심을 놓아 줄 때가 됐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냥 애들이랑 졸업이나 무사히 했으면 좋겠다. 심드렁한 얼굴로 기숙사 침대에 누워 아무도 듣는 이 없는 곳에서 입 밖으로 꺼내본 말이다. 이번 졸업식엔 꽃다발에 파묻혀보는 게 목표다. 요즘 한경은 툭하면 후배나 친구들에게 졸업식 때 꽃다발을 선물로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학생의 용돈에 만만찮은 가격이니 꼭 생화가 아니라도 좋았고 정 부담이라면 종이에 프린터라도 해달라는 소리까지 했다. 꽃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있진 않았다. 향기가 만개한 라일락 정도가 좋다고 느꼈나.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이 꽃말을 알게 된 것도 꽃다발 타령할 때나 돼서였다. 양팔 가득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응원을 끌어안는 것도 괜찮겠다.

 

 

… 공주와 기사는 원래 어떤 관계일까. 제멋대로 공주님의 까탈스러운 고집에도 호위가 임무인 기사라면 감히 무어라 할 수 없을 거다. 종알종알 떠들어대는 공주의 말을 기사는 매번 묵묵히 들어주기만 했을 것 같다. 사랑에 빠진 공주는 그 모습이 그렇게나 사랑스러우면서도 불만이었다. 왜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생각은 안 하는 걸까? 그건 그 마음이 닿지 못한 것 때문에 …

 

 

선배는 선배 같은 사람 만나면 어떨 거 같아요? 사격부 후배가 물었다. 누군가에 대해서 정의하기가 제일 어려웠고 자신조차도 그랬다. 다른 사람 눈으로 본 자신을 먼저 떠올렸다. 썩 좋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만 보이는 진심을 받아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 한경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과도한 친절에 정작 둘은 친해지지 못하고 비즈니스 관계가 되거나, 좋아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죽고 못 사는 관계가 되거나. 어쩌면 서로의 마음을 제일 잘 알아줄 좋은 버팀목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저 혼자 좋아한다고 그 사랑을 온전히 보답받는 건 욕심이다. 표현하는 애정만큼 돌려받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한경은 그럼에도 많은 이들을 소중히 여겼다.

 

흘리고 다니는 성격이라고 했다. 좋아한다는 표현이 고작 흐르는 걸로 치부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 이전에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했다. 가벼운 상담처럼 시작된 대화였고 그 후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한경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율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서 무어라 다른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럴듯한 변명을 꺼내오려 아무 말을 할 때쯤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필사적이 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어떤 말을 하든 똑같이 들리는 게 싫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울고 싶었다. 모르는 척 좋아하는 이름을 불렀다. 기사님. 실은 그 호칭에 되돌아올 답변을 더 듣고 싶었다. 서로에게만 불러주는 말이라서.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다 되는 게 아님은 이미 겪어봐서 안다. 손에 쥔 총으로 과녁을 겨누고 숨을 멈추는 그 순간. 집중할 때 같은 초를 세면서도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시간. 한경은 그 모든 순간을 사랑했다. 적당한 성적이란 건 열심히 하는 사람이 가져서 될 게 아니다. 많은 걸 내려놓은 지금과는 달리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과거로나 거슬러가야 해당되는 말이었지만 언제나 체육관 불이 꺼질 때까지 있었고, 조금 오른 성적에 기뻐할 때가 있었다. 열정과 노력은 고스란히 보답받지 못했다. 혼자서만 애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가까스로 잡아 내려놓지 못할까. 이게 꼭 사격에만 빗대는 말이 아닌 것 같아 한경은 마음이 썼다. 좋아하는 감정에 불씨를 틔우는 것이라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면 좋았을 텐데.

 

 

… 사랑받는 포지션인 기사는 또 눈치가 없어야 제맛이지 않나. 공주님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신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한마디에 잔뜩 심통 난 공주의 표정을 보기 위함이다. 투정 가득한 얼굴이 아니라 조금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듣기에 거북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입을 연 사람을 생각한다면 제일 듣기 싫은 말이었을 테지. 공주는 기사의 질문에 아무런 답도 안 할 거다. 그냥 제 이름이나 불러달라고 요구했으려나. …  

 

 

사랑해, 보고 싶어. 강요에 가까운 말에 앵무새 마냥 돌아오는 목소리로 만족했다. 듣기에 좋으니 그거면 다였다. 이왕 한 말 진심이라면 더 좋겠지만. 한경은 평소에도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 확인받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친구나 후배를 붙잡고 장난스레 건네고 다녔던 똑같은 말을 율에게 꺼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대를 사랑하고 보고 싶은 진심에 들은 사람은 어떤 생각일지 무서워서다. 율이 자신의 성격에 맞춰준다는 사실은 한경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받아주면 더 그래. 그래서 좋아. 그런 말들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제일 듣고 싶었던 사람에게 좋아하는 말을 받고 나서 한 일은 고작 다른 이들에게도 들었다며 강조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특별하지 않은 사람에게 특별한 마음을 들켰다간 지금만도 못 한 사이가 될 거라고, 한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경의 연애는 언제나 진심이었고 그렇기에 그 수가 적었다. 내 표현을 부담 없이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이유 때문에 연애를 할 순 없잖아. 연애라는 이 단어조차도 같은 마음이 하나 더 있을 때야 성립할 수 있는 말이다.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했다. 어떤 말을 해도 율은 의심 없이 받아주겠지. 혼자서만 알고 있는 고백을 몇 번 되뇌는 꼴이 되어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하기로 했을 때, 율이 진심이라는 말을 꺼내고서야 알게 되었다. 침묵은 관계 유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일한 사랑으로 어느 순간 선을 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율의 말에 놀라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것도 잠깐이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관계를 망칠 수 없다. 그래서 당장 율이 보고 싶었다.

 

한걸음에 찾아온 율의 얼굴을 보니 무엇 하나 걷잡을 수 있는 게 없다. 비집고 나오는 웃음도 빙빙 둘러댔던 제 마음까지도. 보고 싶다는 그 말에 곧바로 응해줬단 사실이 제일 컸다. 아니지, 율도 똑같이 보고 싶다던 그 말이었던가. 이것저것 재어 볼 것 없이 한경의 눈앞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게 중요하다. 율을 찾던 그때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을까, 대뜸 부리는 고집에 그저 응해 준 게 아닐까 생각하던 긴장이 탁 풀리는 기분이다. 나는 너를 좋아해. 그렇게 생각하는 한경이 웃는다. 갑자기 다잡은 마음에 거창한 말을 준비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제 자신이 눈앞의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걸 전할 진심 하나면 충분하다. 마주 웃는 그 얼굴에 용기가 생겼다면 율은 믿을까.

 

특별함의 무게는 잘 알고 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하던 말이지만 율에게만은 전할 수 있는 마음을 전부 꾹꾹 눌러 담겠다고 다짐했다. 남에게는 하지 않는 좋아해라고.

  

 

… 요즘은 왕자가 아니라 기사와 이어지는 게 유행이래요. 대세를 뒤따르는 척 못 참은 공주가 먼저 말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공주가 글 밖의 이야기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마 그 왕국에서도 비슷한 소설이 유행하고 있는 걸로 하자. 돌려 말한다고 기사가 알아차릴까? 기대 없이 돌아본 공주의 눈엔 얼굴 붉힌 기사의 얼굴이 보였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게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급전개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피엔딩이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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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을 꿨다.

푸르게 펼처진 하늘 대신 드리운 검은 배경 속엔 흐트러진 하얀 국화가 보였다. 지레 겁을 먹었다. 눈을 비비고, 꼭 감았다 떠 보아도 누렇게 말라가는 국화는 더 선명하게 보일 뿐이다. 교실이 보인다. 한 자리, 그리고 그 옆에 하나 더. 눈에 밟히던 그 자리를 시작으로 하나씩 놓여진다. 아, 싫어. 싫어. 교실에서 뛰쳐나오면 조용한 복도에 서 있는 것은 나 혼자 뿐이었다. 죽은 그 아이가 보인다. 입을 벙긋거린다. 알아듣지 못하는 제게 다가오는 아이를 보고, 나도 모르게 그만 자리에서 도망쳤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저를 사로잡을 상념이 두려워 제 곁에 누군가를 두고 지새우길 며칠이었다. 그 애는 꼭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진실을 알리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제게 방관자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자리에 웅크려 울었다. 입을 막아도 흐느끼는 소리는 새어나왔다. 많이 울었다 생각했는데 그 애를 위해 쏟아낼 눈물은 아직도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 몇 번, 알리겠다 주장했지만 결국은 말 뿐이었다. 내가 이룬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재야, 나 악몽 꿨어."

좋지 않은 내용임에도 네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아쉽게도 네 작은 바람과는 전혀 달랐을 테지. 아침에 눈 띵띵 부은 거 있지. 지금은 괜찮을까 확인하듯 눈 주위를 꾹꾹 누른다. 사람 대신 꽃 한 송이가 덩그러니 놓였다는 걸 제외하면 변함없는 교실에서, 오늘 아침 네가 내 모습을 봤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슬픈 이야기는 이정도로 충분했다. 미안하지만 너에 대한 배려보다는 내가 다시 기억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 더 컸다. 행복한 꿈보다 밤잠을 설친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왜일까. 악몽, 그 단어를 꺼낼 때만 해도 축 처졌던 눈썹이 어젯밤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해준 네가 기쁘다는 듯 부스스 웃는 채로 돌아왔다. 재재는 어떤 꿈 꿨어? 네가 눈으로  한 질문을 되묻는 것은 어쩜 당연했다. 궁금하단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린 아이의 것과 비슷하다.

초등학교도 채 입학하기 전부터 현악기를 잡은 것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욕심이었다. 네 누나에게 주려던 거야. 세상에 없는 이의 말을 꺼낸다. 흥미없는 물건에 대한 강요는 어린 아이에게 당연하게도 거부로 다가왔다. 불편할 정도로 싸고 도는 어머니는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는 것만큼은 용서하지 못했다. 재능은 있지만 좋아하지 않는 것. 결과는 어머니의 승리였다. 무대에 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정숙 속에 수많은 관객이 까만 점으로 보였다.

바이올린을 제외한 모든 것에 흥미를 보이는 것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반항이었다. 직접 해내지도 못할 거면서 말만 거창하게 내뱉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자신과 똑같이 약하게 태어났던 누나는 걸음마도 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죽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정도로 자신을 보살폈다. 학교에 입학을 해서도, 중학교, 고등학교, 차례로 진학하면서도. 운동과 연이 없음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운동장 한 바퀴 반을 겨우 채웠다. 그럼에도 하나 하나 읊어갔다. 졸라맨을 언젠가 사람으로 진화 시키고 싶고, 기타를 치는 이가 멋있으며, 축구를 하며 뛰노는 친구들이 부럽다고.


강아지가 된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이 좋다. 정을 퍼 준 주인에게 그 애정을 돌려받는 기분이었다. 흐. 조금은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부스스 웃는다. 이젠 더 이상 정리할 것도 없었지만 줄곧 움직이는 네 손을 멈추게 할 생각은 없었다. 부러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네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입시는 지옥이야.

"나 빠른이라서 너희보다 한 살 어려. 몰랐지."

자랑이라기에도 애매한 내용이었지만 그 웃음 하나는 당당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한 살이나 젊다며. 돌아온 질문에 고민하듯 음, 작게 소리를 낸다.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해외 여행도 가고, 놀이공원에서도 실컷 놀래. 어, 근데 재재야… 놀 계획이나 잔뜩 세워가던 것을 문득 멈춰버린다. 코를 훌쩍이나 싶더니 너를 부른다. 눈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콧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상하다. 혹시나 싶은 생각에 코 맡에 손을 슬쩍 대본다. 어…

"나 코피 나."

요 며칠 안 자고 버틴 게 화근이었다. 피곤하다 싶더니 기거이 터졌다. 네 얼굴을 보며 멋쩍게 웃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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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얇은 머리카락이 부스스 흩어졌다. 이 길이가 좋다며 짧게 자르지 말라던 앱시디의 말에 가느다란 금빛은 여전히 목을 덮는다. 딘의 옆으로 침대에 묵직함이 느껴졌다. 뭐 해. 아… 그냥요. 읽기는 하는 건지 모르겠는 신문만 팔랑이며 답변은 그게 다였다. 이게 딱 만지고 놀기 좋다며, 썩 깔끔하지 않게 묶인 머리를 흩트리듯 쓰다듬었다. 은은한 샴푸 향이 풍겼다. 샴푸 냄새 좋네. …아…. 끄덕끄덕. 여느 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같은 샴푸를 쓰지 않느냐는 생각을 삼킬 때쯤 앱시디가 잡은 머리칼에 입술을 대었다. 쪽. 장난 치듯 간지러운 소리가 들렸다.

***
달의 한 팔을 벤 채 나란히 누워있는 것은 한참을 징징대며 떼를 쓰던 세원이 승리한 결과였다. 쌤이랑 같이 잘 거거든요? 안 된다는 말에도 박박 우기던 것이 방금이었는데 도닥이는 손길을 받으며 어느새 곤히 잠들었다. 삐죽대는 얼굴을 장착한 채 잔뜩 고집을 피우며 어리광 부릴 때와는 새삼 달랐다. 잘 땐 이렇게 조용하고 예쁘네. 색색. 고요함 속에 규칙적인 숨소리만 울렸다. 가만가만 토닥이던 손을 멈추고 잠든 세원의 머리칼을 살살 쓸었다. 잘 자라. 그 의미를 담아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
양피지 위로 사각사각 지나는 소리에 섞여들던 책장 넘기는 소리가 어느샌가 사라졌다. 고개를 든 빅터의 눈앞에선 유진이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어젯밤 늦게 잠자리에 든 탓일까. 유진. 나지막이 불렀다. 옅은 잠에 빠진 채 고개를 작게 꾸벅일 뿐이다. 유진. 조금 더 커진 소리에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졸음이 묻은 얼굴을 보며 조그맣게 웃음을 흘렸다. 조용한 도서관을 두리번 두리번 둘러보았다. 보는 사람 없겠지. 느릿하게 깜빡이는 유진의 눈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
이젠 익숙하다 이거지. 호그와트에 다닐 때부터 3년이 가까운 연애에, 앱시디의 장난에도 놀라던 반응이 많이 줄었다. 아무리 감각이 없는 부위라도, 입을 맞췄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딘이 괜스레 괘씸했다. 딘. 네? 그린고트가 털리기라도 했대? 아뇨. 무뚝뚝하게도 느낄 짧은 답변에 앱시디는 가볍게 혀를 찼다. 도대체 뭘 보길래 시선을 주지도 않나. 예전엔 더 귀여웠는데. 화들짝 놀라던 때를 기대했을까. 아쉬운 소리를 해대며 기대지도 않고 곧게 앉은 딘의 뒤로 어깨에 턱을 걸쳤다. 아, 알았다. 발갛게 단 귀가 눈에 들어왔다.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틀었다. 쪽, 바로 딘의 귓가에 다시금 간지러운 소리가 울렸다.

***
눈꺼풀로 전해진 부드러운 감촉에 유진의 입꼬리 역시 부드럽게 스르르 올라갔다. 늦게 잤어? 응, 조금? 읽던 것 좀 마저 보느라. 일찍 자라고 했잖아. 타이르는 듯한 빅터의 목소리에도 속없이 웃었다. 조금 독특한 걸까. 유진은 그의 잔소리를 좋아했다. 그리핀도르의 엄마라는 별명을 누가 지었는지, 빅터에게 퍽 잘 어울렸다. 피곤하면 이만 들어갈까? 아니, 괜찮아. 가볍게 고개를 저은 유진의 시선이 빅터 앞의 누런 양피지에 놓였다. 유진. 빅터가 제 이름 부르는 소리가 좋았다. 다시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방금 이름을 불렀던 입술이, 다음 차례라는 듯 콧날에 가볍게 닿았다.

***
두근두근! 의성어가 입 밖으로 뛰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릴라아는 잔뜩 들떴다. 요리책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만든 파스타가 식지 않도록 덮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데울 수도 있겠지만, 맛있는 음식을 체노 오빠가 먹어 준다면 좋을 텐데! 네 시에 너를 만난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할 거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아침 식사로 초대할 걸 그랬나.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며 몇 번이고 시계를 확인했다. 긴 바늘이 아직도 11을 가리키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오빠다! 문이 열리고 보인 얼굴이 반가워서 그만, 까치발을 들어 볼에 입을 맞춰 버렸다.

***
쌔앰. 내려다본 얼굴은 졸음을 대롱대롱 매단 채면서도 아이처럼 히히 웃고 있었다. 안 잤냐. 막 자려구 했는데 쌤이 뽀뽀했잖아요. 일부러인 건지 입술을 삐죽 내며 하는 말이, 늘 그렇듯 책임 전가다. 손을 움직여 쓸어주던 세원의 머리를 헝클었다. 오냐, 뽀뽀해 줬으니까 이제 얌전히 좀 자라. 아아, 머리 헝클이지 말라니까요. 한참 누워 비비적거리다 이미 엉망으로 눌린 주제에 괜히 투정 부렸다. 부비적대며 달을 마주 보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쌔앰, 뽀뽀. 뽀뽀는. 해줬잖아. 아, 왜요. 이마 말구. 무슨 전매특허 마냥. 곧 곽곽댈 것 같은 오리가 되어 떼를 썼다. 쌤이 안 하면 내가 할 거라니까요. 불퉁한 목소리로 삐죽댄 세원이 달의 입술에 쪽, 짧게 뽀뽀했다.

***
움찔. 부끄러운 주제에 티만 안 낸 거였다. 발간 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딘, 나 속이려고 한 거야? 실망이야. 그러면서 입으로는 흑흑 우는소리를 낸다. 당연스럽게도 얼굴엔 장난스러운 웃음을 달고 있었다. 아, 아니, 그…. 더듬더듬 변명하려는 딘을 사이로 둔 채 팔을 뻗어, 그 두 손을 맞잡아 신문을 덮었다. 방금까지 시선을 피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앱시디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녀석이었다. 둘이 함께 곱게 접어 한 켠으로 치워두곤 한 팔을 딘의 허리에 감았다. 고개를 조금 더 내려 부들부들한 머리칼 위로 입술을 부볐다. 부스스 흘러내리며 드러난 목덜미에 묻었다. 촉, 촉. 입을 맞추다 조금은 아프다 싶게 깨물었다. 날 보지 않았다며, 유치한 복수였다.

***
스으은배애. 꼬부라진 발음으로 용케도 전화는 했다. 수화기 너머로 술 냄새가 나는 기분이었다. 민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울림아, 어디야? 나아, 요기. 2호랑 같이 있능데? 3호인가? 익숙한 동네 고양이 호칭을 들먹이는 걸 보면, 분명히 집과 멀지 않은 거다. 그리고 역시나 전봇대 앞에 쭈그려 앉은 복슬복슬한 뒤통수는 울림이 틀림없었다. 울림아, 집에 가야지. 선배다, 선배. 히죽히죽 웃는 얼굴은 꼭 강아지였다. 술에 쩔어 개가 되어 왔다는 말도 썩 틀리지는 않아 보였다. 안녀엉, 놀던 고양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선배, 뽀뽀. 뽀뽀. 나 업어 줘. 뭘 해달라는 건지. 둘 다 포기가 되지 않는지, 민욱의 뒤에 꼭 붙어선 너른 등에 연신 쪽쪽거렸다.

***
오빠 보고 싶었어요! 나도 릴리아 정말 보고 싶었어! 집에서 함께 점심 식사를 하자며 약속을 잡은 것이 바로 전 날의 이야기였다. 아직 현관에서 들어오지도 못한 채 뺨에 입을 맞추고, 감격의 상봉을 하는 것이 그저 좋다며 마주 웃었다. 오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빨리 안 가는 거 있죠? 나도 아침부터 오고 싶었던 거 참았는데! 그 자리에 서서 손을 맞잡은 채 아직 못 끝낸 이야기를 도란도란 주고받았다. 그냥 오빠랑 같이 요리하는 것도 부부 같고 좋았을 텐데. 문득, 언젠가 함께 장을 보며 신혼부부 흉내를 내던 것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누가 봤다면 닭살이라고 했을 테지만. 아무래도 다음번에는 더 일찍 불러 체노와 함께 장도 보고, 요리도 해야겠다. 그려지는 상상에 릴리아의 얼굴엔 행복한 웃음이 모락모락 피었다. 오빠 정말 정말 좋아해요! 체노를 꼭 끌어안아, 그의 가슴에 얼굴을 포옥 묻었다.

***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멀어지는 느낌에 다시 시선을 맞췄다. 책상에 마주 앉아 맞은편으로 건널 듯 일어난 빅터와의 거리가 가까웠다. 어쩜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올까. 연인의 생각에 한가득 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진은 최근 들어 더 그랬다. 본래 미소를 띤 얼굴에, 눈치챈 사람은 몇 없으리라. 사랑스러운 얼굴에 유진은 손을 뻗어 빅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지나는 회색빛 머리카락이 좋았다. 제 어깨에 고개를 얹을 때면, 그 머리칼에 입을 맞추곤 했다. 내려가는 손을 빅터가 다시 잡았다. 유진, 예쁘다. 손도 예쁘고.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이 어떻게 느껴져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빅터가 하는 말이면 그저 좋았다. 예뻐? 응, 예뻐. 진심이야.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제자리에 앉아서도 여전히 손은 잡은 채였다. 정말 진심인 양, 감상하듯 만지작대다, 그 손을 감싸 쥐곤 손목에 입을 맞췄다.

***
가만가만 빅터를 바라보던 유진이 그 행동에 부스스 웃었다. 유진의 눈에도 마냥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빅터도 예뻐.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손도 예쁘고, 다 예쁘네. 했던 말을 따라 하듯 이어나가며 잡은 손을 마주 감싸 쥐었다. 진심이야. 진심이야? 장난스럽게 웃으며 반문하는 빅터에게 응,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더 어떻게 전해주면 좋을까. 맞잡은 손을 제 쪽으로 끌어왔다. 몇 번의 입맞춤에 대한 작은 답례라는 듯, 빅터의 손등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한 번으로 모자라단 듯, 몇 번이고 쪽, 쪽.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키스할까?

***
야, 야. 막무가내인 세원을 손으로 밀어내듯이 하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잠깐의 그 행동에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치, 뽀뽀두 못 하나. 다 크면 실컷 해준대도 그러네. 다 컸거든요? 입술은 언제나 돼야 완전히 들어갈런지. 아무리 봐도 영락없는 오리라며 튀어나온 입술을 집었다. 울상을 지은 채 달의 얼굴을 바라봤다. 진짜루 입술 나오면 쌤 책임이라니까. 그리고 오리 아니거든요? 손을 잡아떼어내고도 툴툴대는 목소리는 여전했다. 달쌤의 달토끼, 하며 선수를 쳤다. 물론 제 얼굴이 꽃이라는 양 꽃받침을 만들어 제 턱 밑에 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도 불만 어린, 못난 표정과의 조화는 아이러니했다. 그래, 그래. 너는 달토끼 해라. 그러니까 어서 자. 자칭 세원 꽃을 향해 손바닥과 굿나잇 인사라도 나누라는 듯 얼굴을 가볍게 덮었다. 아아, 쌔앰. 징징대는 소리로 웅얼대다 부러 입술을 죽 내밀었다. 손바닥이 닿았다. 뽀뽀하듯 쪽 소리를 냈다. 야, 너, 진짜. 당황한 듯 떨어진 손이 다시 세원의 위로 놓였다. 만족스럽게 웃는 세원이 보였다. 나 이제 진짜루 잘 거예요. 쌤 끌어안고 자야지!

***
부둥켜 안기까지 한 하루 만의 재회에 대한 감상을 끝마치고서야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체노가 릴리아의 뺨에 입 맞추는 것 또한 실현되고서. 집에는 새콤한 토마토소스 향이 퍼지고 있었다. 체노를 위해 고심 끝에 준비한 파스타다. 근처 레스토랑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지만, 제 정성도 함께 맛 보여주고 싶었다. 이거 다 릴리아가 준비한 거야? 네, 오빠 주고 싶어서 열심히 했어요! 눈을 반짝이며 파스타를 바라보았다. 그런 체노를 보는 릴리아의 눈빛 또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포크와 스푼을 손에 들고 파스타를 먹기 시작한 체노를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반쯤 섞였던 걱정이, 웃는 얼굴을 보자니 자연스럽게 녹아내렸다. 문득 체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어? 못 보던 게 있는 거 같은데…. 오빠…. 설렘 가득하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손 좀 줘 봐요. 네? 뒤늦게서야 손을 숨기려던 것도 잠시, 머뭇머뭇 손을 내밀었다. 다치지 말아요. 속상한 얼굴로 바라보다 손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알아 챈 릴리아가 허둥지둥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오빠, 오빠. 아! 급하게 만 면발을 체노의 입가에 내밀었다. 멋쩍게 웃는 릴리아를 보며 아, 하고 파스타를 받아먹었다. 오늘은 걱정 잊고 재미있게 데이트해요! 응, 릴리아랑 있으면 뭐든지 다 재미있을 거야! 다급한 상황 전환에 결국 서로 웃음을 터뜨렸다.

***
집 바로 앞에서 기어코 민욱의 등에 업혔다. 몇 발걸음 되지도 않는 거리에서 별 의미도 없는 행동이리라. 현관문은 열려있었다. 등에 기댄 게 편한 것인지 계속 매달려 있으려는 통에, 민욱은 울림의 신발까지 벗겨주는 수고를 해야 했다. 얌전히 방으로 가 잠들면 좋으련만. 어기적어기적 일어난다 싶더니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향한 곳은 도현의 방이었다. 말리려고 해도 술 취한 사람의 마이웨이는, 여간 통제가 쉬운 것이 아니었다. 혀엉, 뽀뽀…. 잘 자고 있는 도현의 위로 풀썩 엎어졌다. 도현의 입장에선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야, 이, 및. 놀라 깬 도현의 입에선 자연스럽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니 이런 미친, 미쳐도 곱게 미쳐, 미친놈아. 아오, 술 냄새. 꾹꾹 밀어내는 손에도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겨우 아래로 내려와선, 도현을 끌어안은 채 배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뽀뽀 타령은 여전했다.

***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물다, 결국은 목덜미에 발간 자국이 생겨났다. 촉, 촉. 한 번, 두 번 입을 맞출 때마다 작게 움찔거렸다. 고개를 묻은 채 입술을 부볐다. 미미한 반응에 장난기가 일었다. 딘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옆으로 풀썩 누웠다. 자리를 옮겨 앱시디는 딘을 내려다봤다. 미묘한 자세는 아직도 쑥스러운 건지, 괜히 시선을 피했다. 나 봐.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딘. 짐짓 엄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슬금슬금 눈치를 보듯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른 데다가도 할까? …아, 그…. 안 보이는 데다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어디다가 둘 지 모르는 눈만 굴리면서도. 물론 부정도 없었다. 가볍게 입 맞춘 앱시디가 딘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드러난 허벅지에 입술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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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하나.
마음속으로 초를 세었다. 꼭 그쯤 되었을 것 같았다. 지금이면 날짜가 지나지 않았을까. 널 바라보는 얼굴은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이어질 일을 되려 제가 기대하는 것 마냥 들뜬 표정이었다. 곧장 입에서 나올 말은 예상할 수 있었을 테지. 생일 축하해!


이맘때면 한창 쌀쌀해질 시기던가. 실내에서도 반팔 티에 가디건을 걸치지 않으면 추웠고, 외출을 할 때면 맨투맨 한 장으로는 견디기 힘들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네게는 겨울로 들어가는 길목이 한층 더 적나라하게 다가왔을지도 몰랐다. 환절기라며 감기를 달고 사는 나와 조금 일찍 늦가을을 맞으며 아직 단풍이 덜 든 길을 걸었다. 차가운 손으로 장난을 친다며 네 손등을 짚었다. 개구지게 웃는 얼굴을 매달고 멈출 줄 모르는 손은 슬금슬금 네 소매 안을 파고들었다. 무얼 하느냐는 네 목소리에도 나는 그득한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겠지. 사시사철 차가운 손은 딱 두 가지 좋았다. 하나는 이마에 오른 열기를 식힐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무기로 삼아 네게 장난을 칠 수 있다는 것.

가을에 태어난 너는 그 계절이 참 잘 어울렸다. 쉴 때면, 문학 공부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어쨌든 책을 쥐고 있는 것도. 달콤한 음료보다는, 왜 맛있는 건지 잘 모르겠는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찾는 것도. 왜인지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 덩그러니 세워놓으면 그것대로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다음에 단풍이 들면 너와 함께 사진이라도 찍어놓을까. 우리가 있었던 자리에 나뭇잎이 떨어져 쌓일 때쯤이면 가장 예쁜 단풍잎을 주워 네게 선물해야겠다. 그때의 네게 슬쩍 물어 좋아할 만한 책 사이에 끼워놓아야지.

이 모든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때에 겨울이 남하했다. 멈출 바를 모르는 아주 길고 긴 겨울.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다. 가족과의 연락이 끊기고 상황을 짐작했을 때엔 네 손을 잡고 울었다. 무서워, 죽기 싫어, 살고 싶어. 너는 아마도 이렇게 답했을 거다. 죽긴 누가 죽어. 우리 안 죽어, 여인형. 바보 같은 너는 늘 너보다는 내 걱정이었다. 더 바보 같은 나는 언제나 네 옷자락을 쥐었다.


울지 않겠다는 말은 진작 예상했지만 지키지 못 했다. 잡히지 않는 너는 어디에서나 나를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숨지 않고 울었다. 눈물을 참겠다던 다짐 대신에, 네게서 도망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택했다. 눈물범벅인 건 비단 나 뿐만이 아니었겠지. 그곳은 가을이냐고 묻고 싶었다. 아이들은 눈이 녹으면 오는 봄을 바랐겠지만 나는 조금 앞선 가을이었으면 했다. 이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도 겨울에서 가을로 바뀔 터다. 겨울엔 내 생일이 있다며 떠들고 다녔었지만, 네가 있는 곳에서는 내 생일까지도 가을이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무얼 더 전할까. 제일 큰 단풍나무 아래에서 기다려 달라고 해야겠다. 별자리를 찾아 줄 가장 밝은 별은 변함없이 네 손을 꼭 잡고 있어야지.

마지막으로 별이 보고 싶었다. 무작정 높은 곳으로 올랐다. 옥상이 잠긴 것은 아쉬웠지만 창문을 열어 몸을 내미는 것으로 만족했다. 언젠가 네 손을 쥐어 그린 동그라미에 네 이름을 붙였다. 조금 후에 결정한 건데, 사실 모든 별에 네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올려 본 가만 하늘은 온통 너였다. 손바닥으로 하얀 별들을 가려 주먹을 쥐었다.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너를 잡을 수 있다며 자랑스레 이야기하면 너는 퍽 다정스럽지 못한 대꾸를 해 줄까.

여즉 바람이 차다. 아직 고개를 내밀지 않은 태양과 높은 위치 때문일 거다. 드문드문 불이 켜진 창문도 꼭 별처럼 보였다. 생일을 축하할 촛불도 너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케이크를 사 올 걸 그랬다. 제일 덜 단 게 뭐였더라. 너는 단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긴 거 하나 짧은 거 아홉에 붙은 불을 꺼 주기는 했을 거다. 소원을 빌라는 내 재촉에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았다 뜨면 뒤늦은 생일 축하 노래가 들리겠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바보냐고 물어도 좋았다. 온전히 네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다.


말했지 않나. 내가 도망칠 곳은 네 옆이라고. 눈을 조금 감았다 뜨면 앞엔 네가 보일 거다. 그래. 아직 꾸지 못한 하늘 여행을 지금 하는 거라고 해 두자. 조금 혼이 날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집을 부려야겠다. 나는 북극성. 너는 내 옆을 비출 별이라고.

웃는 너를 보고 싶다. 별처럼 반짝이며 웃는 너를.

생일 축하해, 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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