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하나.
마음속으로 초를 세었다. 꼭 그쯤 되었을 것 같았다. 지금이면 날짜가 지나지 않았을까. 널 바라보는 얼굴은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이어질 일을 되려 제가 기대하는 것 마냥 들뜬 표정이었다. 곧장 입에서 나올 말은 예상할 수 있었을 테지. 생일 축하해!


이맘때면 한창 쌀쌀해질 시기던가. 실내에서도 반팔 티에 가디건을 걸치지 않으면 추웠고, 외출을 할 때면 맨투맨 한 장으로는 견디기 힘들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네게는 겨울로 들어가는 길목이 한층 더 적나라하게 다가왔을지도 몰랐다. 환절기라며 감기를 달고 사는 나와 조금 일찍 늦가을을 맞으며 아직 단풍이 덜 든 길을 걸었다. 차가운 손으로 장난을 친다며 네 손등을 짚었다. 개구지게 웃는 얼굴을 매달고 멈출 줄 모르는 손은 슬금슬금 네 소매 안을 파고들었다. 무얼 하느냐는 네 목소리에도 나는 그득한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겠지. 사시사철 차가운 손은 딱 두 가지 좋았다. 하나는 이마에 오른 열기를 식힐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무기로 삼아 네게 장난을 칠 수 있다는 것.

가을에 태어난 너는 그 계절이 참 잘 어울렸다. 쉴 때면, 문학 공부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어쨌든 책을 쥐고 있는 것도. 달콤한 음료보다는, 왜 맛있는 건지 잘 모르겠는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찾는 것도. 왜인지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에 덩그러니 세워놓으면 그것대로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다음에 단풍이 들면 너와 함께 사진이라도 찍어놓을까. 우리가 있었던 자리에 나뭇잎이 떨어져 쌓일 때쯤이면 가장 예쁜 단풍잎을 주워 네게 선물해야겠다. 그때의 네게 슬쩍 물어 좋아할 만한 책 사이에 끼워놓아야지.

이 모든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때에 겨울이 남하했다. 멈출 바를 모르는 아주 길고 긴 겨울.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다. 가족과의 연락이 끊기고 상황을 짐작했을 때엔 네 손을 잡고 울었다. 무서워, 죽기 싫어, 살고 싶어. 너는 아마도 이렇게 답했을 거다. 죽긴 누가 죽어. 우리 안 죽어, 여인형. 바보 같은 너는 늘 너보다는 내 걱정이었다. 더 바보 같은 나는 언제나 네 옷자락을 쥐었다.


울지 않겠다는 말은 진작 예상했지만 지키지 못 했다. 잡히지 않는 너는 어디에서나 나를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숨지 않고 울었다. 눈물을 참겠다던 다짐 대신에, 네게서 도망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택했다. 눈물범벅인 건 비단 나 뿐만이 아니었겠지. 그곳은 가을이냐고 묻고 싶었다. 아이들은 눈이 녹으면 오는 봄을 바랐겠지만 나는 조금 앞선 가을이었으면 했다. 이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도 겨울에서 가을로 바뀔 터다. 겨울엔 내 생일이 있다며 떠들고 다녔었지만, 네가 있는 곳에서는 내 생일까지도 가을이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무얼 더 전할까. 제일 큰 단풍나무 아래에서 기다려 달라고 해야겠다. 별자리를 찾아 줄 가장 밝은 별은 변함없이 네 손을 꼭 잡고 있어야지.

마지막으로 별이 보고 싶었다. 무작정 높은 곳으로 올랐다. 옥상이 잠긴 것은 아쉬웠지만 창문을 열어 몸을 내미는 것으로 만족했다. 언젠가 네 손을 쥐어 그린 동그라미에 네 이름을 붙였다. 조금 후에 결정한 건데, 사실 모든 별에 네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올려 본 가만 하늘은 온통 너였다. 손바닥으로 하얀 별들을 가려 주먹을 쥐었다.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너를 잡을 수 있다며 자랑스레 이야기하면 너는 퍽 다정스럽지 못한 대꾸를 해 줄까.

여즉 바람이 차다. 아직 고개를 내밀지 않은 태양과 높은 위치 때문일 거다. 드문드문 불이 켜진 창문도 꼭 별처럼 보였다. 생일을 축하할 촛불도 너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케이크를 사 올 걸 그랬다. 제일 덜 단 게 뭐였더라. 너는 단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긴 거 하나 짧은 거 아홉에 붙은 불을 꺼 주기는 했을 거다. 소원을 빌라는 내 재촉에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았다 뜨면 뒤늦은 생일 축하 노래가 들리겠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바보냐고 물어도 좋았다. 온전히 네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다.


말했지 않나. 내가 도망칠 곳은 네 옆이라고. 눈을 조금 감았다 뜨면 앞엔 네가 보일 거다. 그래. 아직 꾸지 못한 하늘 여행을 지금 하는 거라고 해 두자. 조금 혼이 날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집을 부려야겠다. 나는 북극성. 너는 내 옆을 비출 별이라고.

웃는 너를 보고 싶다. 별처럼 반짝이며 웃는 너를.

생일 축하해, 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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