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을 꿨다.

푸르게 펼처진 하늘 대신 드리운 검은 배경 속엔 흐트러진 하얀 국화가 보였다. 지레 겁을 먹었다. 눈을 비비고, 꼭 감았다 떠 보아도 누렇게 말라가는 국화는 더 선명하게 보일 뿐이다. 교실이 보인다. 한 자리, 그리고 그 옆에 하나 더. 눈에 밟히던 그 자리를 시작으로 하나씩 놓여진다. 아, 싫어. 싫어. 교실에서 뛰쳐나오면 조용한 복도에 서 있는 것은 나 혼자 뿐이었다. 죽은 그 아이가 보인다. 입을 벙긋거린다. 알아듣지 못하는 제게 다가오는 아이를 보고, 나도 모르게 그만 자리에서 도망쳤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저를 사로잡을 상념이 두려워 제 곁에 누군가를 두고 지새우길 며칠이었다. 그 애는 꼭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진실을 알리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제게 방관자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자리에 웅크려 울었다. 입을 막아도 흐느끼는 소리는 새어나왔다. 많이 울었다 생각했는데 그 애를 위해 쏟아낼 눈물은 아직도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 몇 번, 알리겠다 주장했지만 결국은 말 뿐이었다. 내가 이룬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재야, 나 악몽 꿨어."

좋지 않은 내용임에도 네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아쉽게도 네 작은 바람과는 전혀 달랐을 테지. 아침에 눈 띵띵 부은 거 있지. 지금은 괜찮을까 확인하듯 눈 주위를 꾹꾹 누른다. 사람 대신 꽃 한 송이가 덩그러니 놓였다는 걸 제외하면 변함없는 교실에서, 오늘 아침 네가 내 모습을 봤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슬픈 이야기는 이정도로 충분했다. 미안하지만 너에 대한 배려보다는 내가 다시 기억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 더 컸다. 행복한 꿈보다 밤잠을 설친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왜일까. 악몽, 그 단어를 꺼낼 때만 해도 축 처졌던 눈썹이 어젯밤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해준 네가 기쁘다는 듯 부스스 웃는 채로 돌아왔다. 재재는 어떤 꿈 꿨어? 네가 눈으로  한 질문을 되묻는 것은 어쩜 당연했다. 궁금하단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린 아이의 것과 비슷하다.

초등학교도 채 입학하기 전부터 현악기를 잡은 것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욕심이었다. 네 누나에게 주려던 거야. 세상에 없는 이의 말을 꺼낸다. 흥미없는 물건에 대한 강요는 어린 아이에게 당연하게도 거부로 다가왔다. 불편할 정도로 싸고 도는 어머니는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는 것만큼은 용서하지 못했다. 재능은 있지만 좋아하지 않는 것. 결과는 어머니의 승리였다. 무대에 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정숙 속에 수많은 관객이 까만 점으로 보였다.

바이올린을 제외한 모든 것에 흥미를 보이는 것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반항이었다. 직접 해내지도 못할 거면서 말만 거창하게 내뱉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자신과 똑같이 약하게 태어났던 누나는 걸음마도 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죽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정도로 자신을 보살폈다. 학교에 입학을 해서도, 중학교, 고등학교, 차례로 진학하면서도. 운동과 연이 없음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운동장 한 바퀴 반을 겨우 채웠다. 그럼에도 하나 하나 읊어갔다. 졸라맨을 언젠가 사람으로 진화 시키고 싶고, 기타를 치는 이가 멋있으며, 축구를 하며 뛰노는 친구들이 부럽다고.


강아지가 된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이 좋다. 정을 퍼 준 주인에게 그 애정을 돌려받는 기분이었다. 흐. 조금은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부스스 웃는다. 이젠 더 이상 정리할 것도 없었지만 줄곧 움직이는 네 손을 멈추게 할 생각은 없었다. 부러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네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입시는 지옥이야.

"나 빠른이라서 너희보다 한 살 어려. 몰랐지."

자랑이라기에도 애매한 내용이었지만 그 웃음 하나는 당당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한 살이나 젊다며. 돌아온 질문에 고민하듯 음, 작게 소리를 낸다.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해외 여행도 가고, 놀이공원에서도 실컷 놀래. 어, 근데 재재야… 놀 계획이나 잔뜩 세워가던 것을 문득 멈춰버린다. 코를 훌쩍이나 싶더니 너를 부른다. 눈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콧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상하다. 혹시나 싶은 생각에 코 맡에 손을 슬쩍 대본다. 어…

"나 코피 나."

요 며칠 안 자고 버틴 게 화근이었다. 피곤하다 싶더니 기거이 터졌다. 네 얼굴을 보며 멋쩍게 웃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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