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와 기사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꽤 잘 팔리는 클리셰다. 공주는 꼭 왕자와 결혼해야 하는 줄만 알았던 아이들이 자라 새로운 로맨스에 눈을 뜬 모양이다. 실은 얼굴도 모르는 왕자를 기다릴 바에야 늘 공주 옆에서 든든하게 지켜주는 기사를 이미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굳게 다물린 그 입술을 보며 행복한 결말을 상상하고 있었을 거다. 저와 함께 떠나요, 공주님. …

 

 

한경은 어릴 때부터 성격만 살가웠지 좋아하는 건 몇 개 없었다. 인간에 국한한 애정은 주변에 제일 많은 게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불만 많은 소년을 행복해 보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좋아하는 게 뭐냐는 질문에 곧장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불편한 일이었다. 생일에는 갖고 싶은 선물 대신 좋아하는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좋다고 말한 피자를 먹는 게 고작이었다. 싫어하는 게 많은 것도 그랬다. 그렇게 좋아한다고 말한 것들과 온종일 지내고 나서도 비가 온다면 그날 기분은 말짱 꽝이다. 지루하게 흘러가는 생활에 기분을 망치는 것 정도야 아주 쉬웠다. 

 

뭐든 시작은 단순하다. 우연히 TV에 나온 사격 경기가 멋있어 보였고 그걸 흉내 낸다며 몇 번 장난감 총을 사 모으기 시작하더니 끝내 사격장에 가고 싶다고 졸랐다. 남부럽지 않게 부유한 집안 맏이라는 지위는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기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드물게 흥미를 보였다는 이유로 본격적인 장비가 생기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멋진 미래를 상상했다. 좋아하는 일이 생겼으니 나도 누군가에게 꿈을 심어줄 존재가 될 수 있겠지. 자신의 총을 잡으며 부푼 마음으로 꾸는 꿈은 크다.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뭐든지 뜻대로 되는 게 인생이라면 세상 살이 참 편했을 거다.

 

10초가 어느 정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는 건 그냥 하는 말이다. 제한 시간이 걸린 스포츠에 몇 초 단위 의식하는 것 정도는 나름대로 연습되어 있었다. 처음엔 절반, 그다음엔 온전히 채워서. 한경은 눈을 보고 하는 대화를 좋아한다. 자신을 향한 눈빛이 진심을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득 누군가의 눈을 관찰하듯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는 걸 느꼈다. 처음은 그저 장난이었고 진짜가 되어버린 일에 어느 순간 초를 세고 있었다. 무엇 하나에 집중하는 시간은 조금 더 길게 느껴졌다. 곧장 앞에 있는 율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스쳐 지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말을 사소한 기억으로나마 남겨줬다는 사실에 조금 들뜬 것도 같았다. 그 밤은 기분 좋은 날이었다.

 

 

… 식사 예절, 사교 대화, 역사적 상식, 심지어는 걷는 방법까지. 어디에서나 그렇듯 공주는 그 어떤 곳에서든 완벽해야만 했다. 아직도 서툰 부분이 있다며 매번 꾸지람을 듣지 않았을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정해진 삶을 살아가는 공주에게 사랑하는 기사는 도피처로 삼기 좋아 보인다. 위험에 대비해 주위를 맴도는 기사를 어떻게든 찾아내어 새로운 시도를 했겠지. 허락되지 않은 시간 성 밖으로 나가고 싶다며 조르거나 아직 걷는 연습이 필요하다며 손잡아 주기를 요구하며 눈을 맞출 때 공주의 가장 행복한 미소를 기사도 알게 된다면 …

 

 

고등학생 정도면 몇 년을 같이 지낸 가족보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함께 하는 학교 친구들이 더 좋을 수도 있는 나이다. 지금 한경이 딱 그랬다. 끝나지 않은 사춘기 같은 것도 아니었고 뒤늦게 찾아온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주말이면 기숙사에 콕 박혀있었다. 아직도 기숙사에 머물고 있는 친구들을 하나 둘 끄집어내 소소하게 수다 떨며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는 일이 일종의 취미였다. 조용한 기숙사에서 그날 하루 함께 지낼 사람을 찾아내면 기분 좋게 웃곤 했다. 얼마 전 여동생이 전국체전 고등부에서 메달을 땄다며 입이 닳도록 자랑하는 걸 보면 그 질리지 않는 박애주의는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말임이 분명했다. 친구들이 잔뜩 있는 학교생활에 아주 만족한 거라고 해두자. 이곳저곳 관심 가지며 치대는 성정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집에 가는 게 싫다. 가족과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으나 한경 일방적으로 어색하게 느끼는 것뿐이다. 집에 비교 대상이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우울감이 잦다. 해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권태감과 바뀌는 게 없다는 점에서의 무기력함은 사람을 쉽게 망가뜨렸다. 오래도 버텼다. 심해진 감정 기복에서 오는 짜증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을 좋아하는 한경은 또다시 좋아하는 친구를 택했다. 율은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묵묵히 받아줬다. 공주님, 하는 호칭과 함께 들어올려질 때에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잡념 대신에 지금 이 순간 즐겁다는 생각만이 남았다. 꼭 거짓말 같았다. 매 순간 함께 지내는 사람들을 놓을 수 없겠다고. 싫은 감정 가득한 투정을 그저 들어주는 게, 그게 그냥 그렇게도 좋았다.

 

조급함이 문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총을 억지로 쥐고 체육관에 박혀있는 것도 더 이상은 못 할 일이다. 문득 욕심을 놓아 줄 때가 됐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냥 애들이랑 졸업이나 무사히 했으면 좋겠다. 심드렁한 얼굴로 기숙사 침대에 누워 아무도 듣는 이 없는 곳에서 입 밖으로 꺼내본 말이다. 이번 졸업식엔 꽃다발에 파묻혀보는 게 목표다. 요즘 한경은 툭하면 후배나 친구들에게 졸업식 때 꽃다발을 선물로 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학생의 용돈에 만만찮은 가격이니 꼭 생화가 아니라도 좋았고 정 부담이라면 종이에 프린터라도 해달라는 소리까지 했다. 꽃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있진 않았다. 향기가 만개한 라일락 정도가 좋다고 느꼈나.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이 꽃말을 알게 된 것도 꽃다발 타령할 때나 돼서였다. 양팔 가득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응원을 끌어안는 것도 괜찮겠다.

 

 

… 공주와 기사는 원래 어떤 관계일까. 제멋대로 공주님의 까탈스러운 고집에도 호위가 임무인 기사라면 감히 무어라 할 수 없을 거다. 종알종알 떠들어대는 공주의 말을 기사는 매번 묵묵히 들어주기만 했을 것 같다. 사랑에 빠진 공주는 그 모습이 그렇게나 사랑스러우면서도 불만이었다. 왜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생각은 안 하는 걸까? 그건 그 마음이 닿지 못한 것 때문에 …

 

 

선배는 선배 같은 사람 만나면 어떨 거 같아요? 사격부 후배가 물었다. 누군가에 대해서 정의하기가 제일 어려웠고 자신조차도 그랬다. 다른 사람 눈으로 본 자신을 먼저 떠올렸다. 썩 좋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만 보이는 진심을 받아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래서 한경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과도한 친절에 정작 둘은 친해지지 못하고 비즈니스 관계가 되거나, 좋아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죽고 못 사는 관계가 되거나. 어쩌면 서로의 마음을 제일 잘 알아줄 좋은 버팀목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저 혼자 좋아한다고 그 사랑을 온전히 보답받는 건 욕심이다. 표현하는 애정만큼 돌려받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한경은 그럼에도 많은 이들을 소중히 여겼다.

 

흘리고 다니는 성격이라고 했다. 좋아한다는 표현이 고작 흐르는 걸로 치부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 이전에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했다. 가벼운 상담처럼 시작된 대화였고 그 후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한경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율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서 무어라 다른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럴듯한 변명을 꺼내오려 아무 말을 할 때쯤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필사적이 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어떤 말을 하든 똑같이 들리는 게 싫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울고 싶었다. 모르는 척 좋아하는 이름을 불렀다. 기사님. 실은 그 호칭에 되돌아올 답변을 더 듣고 싶었다. 서로에게만 불러주는 말이라서.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다 되는 게 아님은 이미 겪어봐서 안다. 손에 쥔 총으로 과녁을 겨누고 숨을 멈추는 그 순간. 집중할 때 같은 초를 세면서도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시간. 한경은 그 모든 순간을 사랑했다. 적당한 성적이란 건 열심히 하는 사람이 가져서 될 게 아니다. 많은 걸 내려놓은 지금과는 달리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과거로나 거슬러가야 해당되는 말이었지만 언제나 체육관 불이 꺼질 때까지 있었고, 조금 오른 성적에 기뻐할 때가 있었다. 열정과 노력은 고스란히 보답받지 못했다. 혼자서만 애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가까스로 잡아 내려놓지 못할까. 이게 꼭 사격에만 빗대는 말이 아닌 것 같아 한경은 마음이 썼다. 좋아하는 감정에 불씨를 틔우는 것이라도 마음대로 되는 일이면 좋았을 텐데.

 

 

… 사랑받는 포지션인 기사는 또 눈치가 없어야 제맛이지 않나. 공주님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신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한마디에 잔뜩 심통 난 공주의 표정을 보기 위함이다. 투정 가득한 얼굴이 아니라 조금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듣기에 거북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입을 연 사람을 생각한다면 제일 듣기 싫은 말이었을 테지. 공주는 기사의 질문에 아무런 답도 안 할 거다. 그냥 제 이름이나 불러달라고 요구했으려나. …  

 

 

사랑해, 보고 싶어. 강요에 가까운 말에 앵무새 마냥 돌아오는 목소리로 만족했다. 듣기에 좋으니 그거면 다였다. 이왕 한 말 진심이라면 더 좋겠지만. 한경은 평소에도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 확인받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친구나 후배를 붙잡고 장난스레 건네고 다녔던 똑같은 말을 율에게 꺼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대를 사랑하고 보고 싶은 진심에 들은 사람은 어떤 생각일지 무서워서다. 율이 자신의 성격에 맞춰준다는 사실은 한경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받아주면 더 그래. 그래서 좋아. 그런 말들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제일 듣고 싶었던 사람에게 좋아하는 말을 받고 나서 한 일은 고작 다른 이들에게도 들었다며 강조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특별하지 않은 사람에게 특별한 마음을 들켰다간 지금만도 못 한 사이가 될 거라고, 한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경의 연애는 언제나 진심이었고 그렇기에 그 수가 적었다. 내 표현을 부담 없이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이유 때문에 연애를 할 순 없잖아. 연애라는 이 단어조차도 같은 마음이 하나 더 있을 때야 성립할 수 있는 말이다.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했다. 어떤 말을 해도 율은 의심 없이 받아주겠지. 혼자서만 알고 있는 고백을 몇 번 되뇌는 꼴이 되어도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하기로 했을 때, 율이 진심이라는 말을 꺼내고서야 알게 되었다. 침묵은 관계 유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안일한 사랑으로 어느 순간 선을 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율의 말에 놀라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것도 잠깐이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관계를 망칠 수 없다. 그래서 당장 율이 보고 싶었다.

 

한걸음에 찾아온 율의 얼굴을 보니 무엇 하나 걷잡을 수 있는 게 없다. 비집고 나오는 웃음도 빙빙 둘러댔던 제 마음까지도. 보고 싶다는 그 말에 곧바로 응해줬단 사실이 제일 컸다. 아니지, 율도 똑같이 보고 싶다던 그 말이었던가. 이것저것 재어 볼 것 없이 한경의 눈앞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게 중요하다. 율을 찾던 그때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을까, 대뜸 부리는 고집에 그저 응해 준 게 아닐까 생각하던 긴장이 탁 풀리는 기분이다. 나는 너를 좋아해. 그렇게 생각하는 한경이 웃는다. 갑자기 다잡은 마음에 거창한 말을 준비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제 자신이 눈앞의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걸 전할 진심 하나면 충분하다. 마주 웃는 그 얼굴에 용기가 생겼다면 율은 믿을까.

 

특별함의 무게는 잘 알고 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하던 말이지만 율에게만은 전할 수 있는 마음을 전부 꾹꾹 눌러 담겠다고 다짐했다. 남에게는 하지 않는 좋아해라고.

  

 

… 요즘은 왕자가 아니라 기사와 이어지는 게 유행이래요. 대세를 뒤따르는 척 못 참은 공주가 먼저 말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공주가 글 밖의 이야기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마 그 왕국에서도 비슷한 소설이 유행하고 있는 걸로 하자. 돌려 말한다고 기사가 알아차릴까? 기대 없이 돌아본 공주의 눈엔 얼굴 붉힌 기사의 얼굴이 보였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게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급전개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피엔딩이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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